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수아 뒤발리에 (문단 편집) === [[독재자]]로서의 행각 === [[아이티 대통령|대통령]]에 취임 이후 뒤발리에는 초기에는 억압되던 [[부두교]]의 전통성을 인정하고, 국민복지를 펼치는 정책을 펼치며, [[물라토]] [[엘리트]]들이 독점하고 있던 공직 및 요직을 [[흑인]]에게 개방하는 등의 나름 현명한 정책을 보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권력의 맛에 점차 중독되면서 날이 갈수록 추악한 독재정치를 펼쳤으며, [[아이티군]]의 지도자들을 실각시키면서 점차 군대를 분열시켰다. 후술하듯 뒤발리에의 학정은 [[호르헤 비델라]] 외에는 적수가 전혀 없을 정도로 중앙아메리카에서도 독보적인 수준이었음은 물론, 무려 [[북한]]과 [[이디 아민]] 치하 [[우간다]]에 비견될 정도로 인류 역사의 어떠한 국가들을 들고 와도 꿇리지 않을 정도로 잔인하고 무시무시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의외로 잘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뒤발리에는 집권 초반에도 몰래 잔인한 처벌 집행을 자행했으며 간간히 독선적인 면모를 보였다. 이 시기에 뒤발리에의 [[비밀경찰]]들은 선거 몇 주 뒤에 정적들과 관련있어 보이는 집안의 11살 [[소년]]들을 비밀리에 덤불로 끌고 가 나무 몽둥이로 구타하거나 일가족을 모두 구금하는 등 냉혹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취임 1년 정도 되는 [[1958년]] 7월 28~29일에는 3명의 추방된 아이티의 육군 장교들이 미국인 용병 5명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그는 쿠데타 참여자들을 모두 사살한 후 고위급 장성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육군사관학교를 폐교시킨 후 추가 쿠데타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군의 무기와 장비를 대통령궁으로 옮겼다.[* 이것이 와전되어 뒤발리에가 쿠데타를 막기 위해 [[아이티군]] 자체를 해체시켰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아이티군은 쿠데타 실패 이후에도 계속 남되 1968년에 군인 수가 단 5천 명으로 축소되는 등 뒤발리에의 수족처럼 부려졌다. 아이티군의 해산은 권력을 세습받은 뒤발리에의 아들인 [[장클로드 뒤발리에]]가 실각하고도 10여년이나 지난 1995년에야 해산되었고, 이후 2017년에 '아이티 방위군'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재건되었다.] 이 쿠데타는 뒤발리에에게 오히러 축복이 되었는데, 쿠데타 진압 1주일 후 뒤발리에는 [[자칭 신|"나는 아이티를 정복했다. 그리고 권력을 쟁취했다. 내가 새로운 아이티다. 나를 파괴하려 하는 자들은 아이티를 파괴하려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이티는 나를 통해서 숨을 쉬며 나는 아이티를 통해서 존재한다. 신과 운명은 나를 선택했다."]]라는 대국민 연설을 남기고 헌법의 일부 조항을 정지시킨 후 '국가 안보' 유지를 위해 필오한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전권을 본인에게 부여했다. 이렇게 쿠데타 이후 1년 만에 무려 300명이 뒤발리에의 직접적인 명령으로 살해되었다. 1959년 5월 24일에 뒤발리에는 [[인슐린]] 과다복용으로 [[심장마비]]에 걸려 9시간 동안 혼수상태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뒤발리에의 주치의는 이 심장마비로 뒤발리에가 신경에 손상을 입어 정신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후술할 기행과 악행들을 저지른 것으로 보았다.[* 이와 비슷하게 10년 동안 '''전란도 없이''' 인구의 '''절반'''에 달하는 인명 손실을 입힌 학정을 저질러 '아프리카의 [[폴 포트]]'로까지 불렸던 [[적도 기니]]의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도 실제로는 마약중독자에 온갖 정신병을 앓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나마 뒤발리에는 마약을 복용했다는 말은 없다.]. 안 그래도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뒤발리에는 자기가 몸져누웠을 당시 권한대행이던 클레멘트 바르보(Clement Barbot, 1914~1963)[* 후술할 비밀경찰 '통통 마쿠트'의 초대 수장. 학교 교사 출신이었다.]가 자기의 권력을 찬탈하려 암살을 시도했을 거라 믿어서 1960년 7월 14일에 바르보를 정적으로 간주하고 체포하여 감금했다. 이 무렵에도 뒤발리에에 대한 원한이 주변에 점점 퍼져 있었는지 뒤발리에의 아버지의 묘소가 훼손되고 유골이 흩뿌려지는 적까지 있었다고 한다. 1961년 4월 30일에 아이티에서는 인류 선거사에 영원히 남을 해괴한 [[선거]]가 펼쳐졌다. 당시에 임기가 2년이나 남아 있었던 뒤발리에는 재선이 금지되던 헌법 조항을 어기고 대통령 선거에 야당의 경쟁자 하나 없이 유일한 후보로 나가 '''1,320,748명 투표, 1,320,748명 찬성, 즉 찬성 100%'''라는 경이적인 득표결과 집계를 하여 [[북한/정치#s-4|100% 찬성]]이라는 엽기적인 기록을 세웠다.[* 이후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도 2002년 10월 16일에 열린 대통령 선거에 단독 선거로 출마해 '100% 투표, 100% 찬성'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당연하지만 [[뉴욕 타임즈]]는 이 선거에 대해 "라틴 아메리카에는 역사상 수많은 [[부정선거]]가 있었지만 이 선거만큼이나 어처구니가 없는 일은 없었다"라고 비판했다. 거기에 통통 마쿠트는 교회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강제로 투표소로 끌고 가거나 7살 아이에게도 투표를 강요하고는 이를 '자발적인 찬성 표시'라고 사실을 완전히 왜곡했다. 뒤발리에는 이 황당한 선거를 '국민들이 뒤발리에를 그에게 권력을 부여한 하느님처럼 아주 오래 통치하기를 바라는 마음'의 징표로 받아들이고는 "나는 인민의 뜻을 받아들인다. 나는 혁명가로서 인민의 뜻을 무시할 권리가 없다"는 선언을 했으며, 동년 5월 22일에 있던 취임식을 위해 통통 마쿠트는 대형 트럭에 5만 명의 국민들을 사실상 압송한 후 이동하는 하루 동안 음식도 전혀 주지 않으며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채찍을 휘둘렀다고 한다. 5만 명이 참석한 취임식에서 뒤발리에는 '여러분이 곧 나이며 내가 곧 여러분이다'라고 선언했다. 상술한 악연 때문에 뒤발리에에 원한을 품게 된 바르보는 1963년 초에 석방된 후[* 뒤발리에는 이때 그에게 '자비롭게' 새 자동차를 선물했다.] 동년 4월 26일에 대통령 차량을 타고 등교하는 뒤발리에의 자식 2명(장클로드와 시몬)을 유괴하고 뒤발리에를 직접 실각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유괴 계획이 들통나 실패하고 통통 마쿠트에게 추격당하던 상황이었다. 뒤발리에는 이 유괴 사건의 범인이 바르보가 아닌, 전직 [[중위]] 겸 명사수이던 데다가 이 사건을 '뒤발리에의 자작극일 것이다'라고 주장했던 프랑수아 브누아(François Benoit)일 거라고 믿었고, 뒤발리에의 마음을 알아챈 브누아가 탈출하자[* 이후 브누아는 [[도미니카 공화국]] 대사관에 도피했다가 미국으로 망명한 후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는 [[제너럴 모터스]]에서 일하다가 1986년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https://www.baltimoresun.com/news/bs-xpm-1992-10-04-1992278132-story.html|#]]] 대통령의 명을 받든 통통 마쿠트는 그 대신 브누아의 집에 찾아가 그의 부모를 살해한 후 7개월 된 아들과 그 아기의 유모, 다른 가사 노동자가 집에 있는데도 집에 불을 지르고는 이 계획에 가담한 것으로 의심되는 군 장교들과 그들의 가족들(어린이 포함), 그들의 가사 노동자들, 단순히 그들과 같이 있던 사람들까지 닥치는 대로 사살했고, 심지어 브누아 아르망(Benoît Armand)라는 이름의 애꿎은 변호사마저 이름이 '브누아'라는 이유만으로 살해했다. 이 하루 동안 죽거나 '실종'된 사람들은 확인된 사람만 무려 73명에 달한다. [[http://touthaiti.com/touthaiti-actualites/2181-26-avril-2013-50-ans-deja-ou-duvalier-avait-massacre-des-enfants-enleve-des-familles-entieres-arretees-torturees-tuees-disparues|당시 사망자 명단과 정보]] 이후 바르보가 진범이란 것을 알게 된 뒤발리에는 바르보가 검은 [[개]]로 변신해 잡히지 않는다는 말을 믿고 경찰에게 '''포르토프랭스에 있는 모든 검은 개를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리고 바르보는 그로부터 얼마 안 지난 1963년 7월 14일에 통통 마쿠트한테 검은 개가 아닌 사람의 모습을 한 채로 동생과 함께 기관총으로 [[사살|즉결 처분]]된 후 신문에 시신이 실리게 된다. 그리고 뒤발리에는 동년 여름에 망명한 반대파들의 잠입 시도가 적발되자 아예 아이티의 모든 시민권을 6개월 동안 정지시켰으며,[* 이에 대해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프랑크 디쾨터]]는 '그럼에도 이런 결정은 상징적인 조치에 불과했는데 이미 정지할 자유 자체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라고 평가했다.] 동년 9월 17일에는 공식적으로 여당인 국가혁명당 1당만 허용되고 야당은 모두 금지되는 [[일당제]] 국가를 선포했다. 1964년 6월 14일에 있던 종신 대통령제 찬성 투표는 1961년 대통령 선거와 맞먹는 황당선거였는데, 찬성표가 '''99.9%'''가 나왔다길래 확인해봤더니 각 사람이 투표할 수 있는 횟수에 제한을 두지 않은 것을 넘어서 '''모든 투표용지에 미리 찬성표에 표시를 한 상태였다고 한다.'''[* 하다못해 [[3.15 부정선거]] 등의 악명 높은 [[부정선거]]에서도 투표자가 원하는 후보를 찍게 했는데, 이 선거는 아예 대놓고 선거의 원칙을 완전히 부정한 셈이기에 '선거'라고 불러야 할지도 의문이 가는 수준이다.] 이 선거에서 찬성표 VS 반대표는 '280만 VS 3234'였으며 나머지 1%에 해당하던 3234명의 [[탄압|최후는 어땠을지]] 상상에 맏긴다.[* 이들도 경찰들에 의해 비밀리에 고문 또는 사살되었다는 말이 있다.] 8일 뒤인 6월 22일에 열린 대통령 취임식에 뒤발리에는 1시간이나(!) 지각을 해 놓고 1시간 30분이나 연설을 했는데, 뒤발리에가 오기 전부터 모두 서 있어야만 했던 청중들 중 한 독일인 외교관이 지쳐서 의자에 앉자 뒤발리에는 연설을 중단하고는 의전 담당관에게 그 외교관을 다시 일어나게 하라고 지시하는 군기잡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렇게 뒤발리에는 죽을 때까지 대통령으로 집권하게 된다. [[파일:아이티 국기(1964-1986).svg|width=200]] 뒤발리에가 종신 대통령이 된 이후 아이티의 국기는 위와 같이 변경되었고,[* 이는 프랑수아의 아들인 [[장클로드 뒤발리에]]가 실각한 [[1986년]]까지 쓰이게 된다.][* 이 국기의 검은색은 아프리카와 아이티의 관계를 상징한다.] 공공 장소와 학교는 물론, 거리에도 뒤발리에의 초상화가 전시되었다. 그리고 1965년경에는 국가의 전체 재원의 65%를 '국가 안보'에 할애하게 되었으며[* 물론 그 '국가 안보'라는 것이 실제로는 반뒤발리에 인사들에 대한 탄압이었다는 것은 안 봐도 뻔하다. 실제로 상술한 마시아스 응게마도 국민 탄압 외에는 국정 운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는 반응게마 인사 탄압을 '내부 안보'라고 포장했다.], 뒤발리에는 공식 직함인 대통령에서 한 단계 넘어 스스로를 '군주'라고 자칭하며 [[장 베델 보카사|황금색과 파란색이 섞인 '왕좌'에 앉은 채]] 국민들의 생살여탈권부터 '크레올'이라는 단어에 들어갈 철자까지 모든 것을 결정했다. 물론 뒤발리에는 모든 결정에 관여하면서도 나라를 통치하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그의 참모들은 구체적인 권한도 명시되지 않은 공식 직함을 몇 개씩 맡으면서 행정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으며[* 뒤발리에는 충직한 부하들이 유능하기까지 하면 의심만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미국인 참모는 뒤발리에가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조종하는 데에 모든 시간을 소비한다'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뒤발리에는 대통령궁을 좀처럼 벗어나지 않고 전국을 순회한 적도 한 번도 없었으며, 1년에 몇 차례 통통 마쿠트의 주도로 군중들을 동원해 자신을 찬양케 하는 것 외에는 공개석상에 나오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가 집권할 동안 아이티는 [[프랑크 디쾨터]]의 말처럼 군부도, 당파도, 파벌도, 이름뿐이 아닌 진짜 정당도 없고, 오직 뒤발리에에 대한 충성심에 대한 경쟁으로 서로의 자리를 빼앗고자 하는 부하들만 존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